이태규와 몇몇 후배들이 태백산엘 가잔다. 가는 길에 영월 동강 어라연을 들러 가잔다. 태백산은 지난 5일 다녀 온데다, 이번에도 눈이 올 것 같지 않아 마뜩치 않았지만 어라연을 들르지는 말에 생각이 달라진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태규, 김규태, 지도연, 윤성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약 3년전, 텍사스에 사는 큰애 부부와 손주 녀석들이 와서 오랜만에 설악산과 동해안 일대에 가족여행을 갔었는데, 그때 마지막을 영월에서 보냈었다. 그때 들른 곳이 주천강 일대의 선암마을과 한반도 지형을 거쳐, 주천강이 평창강과 만나 서강을 이루는 지점의 청령포와, 다시 서강이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의 본류를 이루는 지점의 고씨동굴 등이었다. 영월역을 중심으로 서쪽편을 여행한 셈인데 이번에는 그 반대편을 여행하는 셈이다.
아침부터 서둘러 온 길인지라 정오가 되기 전에 영월역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하기로 한다. 도연이가 찾아온 동강다슬기집으로 향한다. 비단 이집이 아니더라도 동강이 원래 청정 지역으로 각종의 민물고기와 다슬기로 유명해서 이 일대는 다슬기집이 대세다. 시래기와 무언지 모를 여러가지 말린 채소에 풀어진 된장과 다슬기의 오묘한 맛이 숨어있던 미각을 건드린다. 언젠가 충북 괴산에서의 부추를 잔뜩 넣어 끓인 잊지 못할 올갱이국과 어머니 젊으셨을 때 아욱을 넣어 끓여 주시던 올갱이국과는 또 다른 맛이다.(충청도에서는 다슬기를 올갱이라고도 한다) 엇저녁의 주취가 말끔해지는 느낌이다.
식당을 나오니 길건너 커다란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고풍을 간직한 전통 한옥이다. 집 앞에는 넓지 않은 광장까지 있어 대단한 위세다. 자세히 보니 집이 아니라 영월 역사다. 설명을 보니 전국의 역사중 가장 아름다운 역중의 하나로 이미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단다. 그러나 내겐 그렇지 않다. 내가 기대한 영월역은 어렸을적 고무신 신고 동무들과 뛰어놀다 기적소리 들리면 역무원들께 혼나 도망다니던 그런 역을 상상했다. 그런 추억이라는 남루한 풍경은 어디가고, 밝고 깨끗하고 깔끔하면서도 커다랗게 변장한 역사가 덩그러니 서있다. 역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이곳 주민들께는 편리하고 필요했겠지만, 옛 모습과 자연을 그리며 찾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영월역을 벗어나 어라연 트레킹에 나선다. 오늘의 코스는 도연이가 안내하는대로 삼옥안내소 - 잣봉 - 어라연 - 된꼬까리 - 만지나루를 거쳐 원점 회귀하는 코스다. 약 9Km.
트레킹을 시작하는 길은 잘 포장된 임도다. 이렇게 산길을 포장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나 다를까, 포도의 마지막엔 많지는 않지만 농가가 나타난다. 이 한겨울에도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무언가 모를 묘목을 심어 놓았다. 2-3m 크기의 비교적 큰 묘목에 쇠기둥으로 지지대까지 세운 것을 보니 뭔지 몰라도 중요한 나무인 듯 하다. 요즘 산골 마을의 한겨울은 보이지 않게 바쁜 일상인가 보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농가를 지나 잣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30도 정도 되어보이는 경사를 따라가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의 산 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당연히 꼴찌는 나다. 가쁜 숨 몰아쉬며 깔딱고개를 오르니 하늘이 밝아온다. 드디어 능선이다. 능선길의 평화로움이 온몸을 위무한다.
능선길에서 본 비정상의 소나무 한그루. 한구비 비틀린 소나무가 아름답지만 웬지 처연하다. 뭔가 모를 환경상의 제약으로 장애가 생겨 나름 고통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보는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사진에 담기 바쁘다. 우리들 살림살이도 그런것 아닌가? 알고보면 비극인 것을 웃고 있다고 희극인 줄로 착각하면서.... 이 나이에 이제부터라도 역지사지하면서 살아야겠다.
잠시뒤 찾은 잣봉의 표지석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537 m. 솟은 나무틈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어라연의 자태, 흰 모래사장과 응달진 곳의 잔설,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만큼 짓푸른 강물, 산 정상에서도 선명한 강가의 얼음 등이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솟은 땀을 말리기에 충분히 시원한 바람과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솔잎과 솔방울과 가랑잎 속을 걷는 이방인의 콧노래가 흥겹다. 멀리 이름 모를 고산준령의 실루엣이 겹겹이 흐른다.
오르는 길이 가팔랐으니 내려가는 길은 오죽하랴? 햇빛에 더욱 붉게 보이는 금강송을 옆으로 하고 하산하는 길은 마치 저 아래 동강으로 내리 꽂는 듯하다. 저린 다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기를 얼마만인가? 드디어 어라연에 도착한다. 절벽 아래 펼쳐진 푸른 물이 이내 한눈에 들어온다. 동강의 절경중 제 일경이라는 아름다운 어라연은 굽이치는 강 한복판의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이 갈라져 흐른다. 상선암 주변의 모든 물이 다 꽁꽁 얼었는데 상선암 바로 아래 물길 두세 가닥은 힘차게 흐른다. 이즈음의 강추위도 그 물살의 힘을 이기지 못한 때문이리라. 그 상선암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군락이 아름답기 전에 외로워보인다.
어라연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궁금한데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NAVER에 물어보니 옛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날 이곳에 어라사(於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어라연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처음엔 於羅淵이었으나 후에 魚羅淵이라고도 부른단다. 물고기가 많은 이유일터다.
어라연을 지나 강가를 따라가는 길은 평이하다. 길은 편한데 웬지 강엔 크고 작은 돌들만 무성하고 잔설이 흩뿌려져있다. 한눈에 보아도 수량도 적은데다 얼음에 덮여있어 중상류의 동강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 여름 래프팅과 카약을 즐기는 곳이라기엔 믿기지 않는다. 더우기 옛날 떼목을 이어나르는 뗏꾼들이 수난을 당했다는 된꼬까리 일대가 어디인지 구분을 못하겠다. 그런데 이때 규태가 무언가 동영상 찍기에 분주하다. 보아하니 근처 바위틈을 휘돌아 흐르는 물소리를 담으려 하는가 보다. 아하! 그렇다. 바로 이곳이 된꼬까리 여울물인가 보다. 지금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만 여름엔 힘찬 물살이 여간 아닐터다. 그 물살의 힘을 못이겨 동장군도 바위틈의 헛점을 드러내고만다.
이 지점을 지나니 옛 전산옥 터라는 표지만 덩그러니 서있다. 그러니까 바로 이곳이 된꼬까리의 여울물에서 곤경을 치르고 난 뗏꾼들이 찾았을 막걸리 집이었으리라.
된꼬까리를 지나 한참을 걸어 만지나루에 이르니 제법 수량도 많고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일체의 취사와 어로 행위를 금지한 탓에 청정함도 유지하는 듯하다.
이제 모든 트레킹을 마치고 원점 회귀한다. 그런데 길건너 작은 학교에 플래카드가 선명하다. 거운분교 [황승준의 졸업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다. 아마 이번 졸업생이 한명 뿐인가 보다. 30여년전 석탄산업 구조조정으로 태백, 영월 등에 인구가 줄고, 살림살이 또한 좋을리 없어 당연히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이유이리라. 문득 지난해 가을 제주도 비양도 여행시 비양분교에서 전교 학생이 한명 뿐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학생도 이번에 졸업했을텐데 그 학교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하기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내가 2학년때 분교가 설립되어 그후 17년만인 1980년도에 폐교되었으니, 이곳 거운분교는 아주 오랜동안 명맥을 유지하는 셈이다.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오른다. 논두렁 밭두렁과 호젓한 산길을 따라 오가던 등하교길, 그때는 그렇게 크게 보이던 저수지와 학교 운동장. 하교길에 같이 오던 동무들중 그 동네 아이들은 집에 다 왔는데 우리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아쉬움. 이제는 모두 추억거리다. 아니 추억을 지나 희미한 연기처럼 뿌연하다.
태백산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태백산에 오르는 길. 유일사 주차장 시작점부터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눈을 보기 어렵겠다던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아주 잘된 일이다. 엇저녁에 내린 듯한 눈발에 북풍한설이 나그네의 앞길을 어지럽힌다. 유일사 가는길로 약 700여미터쯤에서 태규가 인도하는대로 사길령 방향으로 길을 바꿔 오른다. 가파른 길이 계속 지그재그이다. 아무도 가지않은 눈밭이다. 어렴풋한 길 모습 위를 어림잡아 걷는다. 오르던중 땀에찬 웃옷가지를 벗어 정비하고, 아이젠도 착용하고 다시 오른다. 얼마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하늘이 보인다. 바로 위가 능선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능선에 오르자마자 그동안의 고요함은 어디가고 칼바람이 옷속을 파고든다. 서 있기가 어렵다. 버텨주는 나뭇등에 기대어 다시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는다. 한겨울 눈 속에서 칼바람을 마주하며 오르는 태백산의 진면목을 본다. 사람들도 별로 없는 겨울산에서 호젓한 마음으로 사진도 마음껏 담는다. 장군봉과 태백산 표지석에서, 천제단과 아름다운 주목 앞에서....
어제 오늘 어라연과 태백산을 안내해준 도연이와 태규, 엇저녁에 먹거리의 모든것을 챙겨준 성구와 규태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