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새해 첫 산행은 오정훈, 황정열, 강영식 부부와 함께한다. 목적지는 여느해처럼 민족의 영산 태백산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우리들만"의 산행과 달리 이번에는 "반더룽 산악회"라는 산악회를 따라온 것과, 의례껏 유일사 매표소에서 시작하던 산행을 산악회의 코스에 따라 화방재에서 시작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산행 시작 전부터 산악회 가이드의 안내에 몸이 저려온다. 오후 4시까지는 식사까지 모두 마치고 탑승하라는 안내에 짐짓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산악회를 따라가는 산행에 처음 동참하는 아내와 몇몇 회원들의 산행길이 우려되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산허리 뒷부분을 돌아가는 응달진 곳의 잔설에 미끌어져 넘어진 아내의 비명이 아득하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보니 그래도 다행히 잘 일어선다. 엉치가 아프다면서도 종종걸음을 이어가는 모습이 안스럽다. 아내의 느린 걸음으로 산행길이 길게 늘어섰다. 어쩔 수없이 다른 일행을 먼저 가도록 길을 터주고 우리 일행은 뒤로 빠진다. 맨뒤에 쳐지는 산행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사길령" 표지석에서 모두들 복장을 매만지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잠시 숨을 고르느라 서성인다. 아내는 쉼도 없이 먼저 출발한다. 그 모습이 측은하다. 그래도 깔딱고개라는 급경사도 꿋꿋이 잘 걷는다. 다행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에 올라서니 산영각이라는 당집이 눈에 들어온다. 옛 보부상들이 이곳을 넘어야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데, 산적으로부터의 피해를 막기위해 제사를 지냈던 곳이란다. 그런위험을 무릅쓰고도 이곳을 오가야 하는 보부상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산영각을 지나니 양지바른 능선으로 걷기 편한 길이다. 이런 길만 있다면 큰 어려움이 업으련만.... 하지만 유일사 쉼터를 지나니 길도 오르막인데다가 언제 왔는지 모를 잔설이 남아 있고, 오고가는 등산객이 많아 병목 현상까지 생긴다. 숨이 턱에 차서 오르는 아내를 보니 병목 현상이 차라리 다행인듯 싶다. 한두 그루 우뚝선 주목 주변으로 은빛 수피의 사스레 나무와 산갈나무, 분비나무 등이 어서 오라 응원한다.
드디어 주목 군락지다. 이제 산행은 9부 능선을 넘은 듯하다. 비교적 공간이 넓고 양지 바른 곳인지라 점심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남쪽을 바라보니 멀리 풍력 발전소의 바람개비가 어렴풋이 행렬을 이룬다. 높고 낮은 산등성이 명암을 달리하며 겹겹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미세먼지 탓인지 띠를 이룬 구름 아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언제나 보는 고사주목의 모습은 오늘도 한결같다. 용가리를 빼어 닮은 용가리 주목,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으로 가지를 이리저리 뻗어올린 주목, 늘 바람의 시련으로 안타까이 서있는 주목 등등.... 주목은 죽어서도 천년이라는데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언제까지 보여주려나? 비록 나목이지만 한조각 희망이라도 품고 서 있으면 아쉬움이라도 덜 할텐데. 이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언제나 그 모습일 고사목이 처연하기 한이 없다.
주목 군락지를 뒤로하고 천제단과 최고봉인 장군봉에 오른다. 태백산의 표지석이 선명하다. 유난히 날이 좋은 오늘이지만 그래도 태백의 기운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그 기운을 모시고 수천년간 제사를 모신 천제단에서 올해도 내게 천기를 주실 것을 기원해본다.
파란 하늘 아래 구름띠를 두르고 첩첩이 겹쳐있는 이름 모를 산들과 어우러져 빚어낸 비경을 한참동안이나 감상한다. 태백산의 표지석 앞에는 인증샷을 구걸하는 많은 인파로 넘쳐난다. 멀리 범 태백의 최고봉인 함백산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 산은 어려움 없이는 큰 즐거움도 주지 않는다. 여러해의 시작을 이 산행과 함께 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칼바람 맞으며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젖은 신발 이끌고 올라가야 멋진 설원의 풍경과 찬연한 상고대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있다. 오늘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세상사 어디서나 공짜 점심은 없는 듯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길에오른다. 정상의 바람을 피하여 잠시 내려와 망경사 앞에서 조촐한 점심을 한다. 4시까지 집결하라는 가이드의 지시(?)에 충실하고자 모두 다 서두른다. 그러나 날이 좋다고는 하나, 그래도 태백산의 바람인데... 컵라면의 결기가 잘 풀어지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언 김밥을 라면 국물과 같이 하니 나름 꿀맛이다. 이렇게라도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당골 집결지 부근의 많은 음식점에 들르지 않기 위함이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어느 음식점이든 한결같이 그나물에 그밥인데다, 불친절과 돈만 생각하는 상술이 역겹기 때문이다. 이런 관광지의 폐해가 언제나 개선되려는지....
부지런히 내려왔지만 오는 길에 일행중 몇몇이 엉덩방아를 못피해 결국 우리 때문에 10분 정도 차량 출발이 지체되었다.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그래도 양재역에 도착할 때는 "오늘처럼 차가 안밀려 빨리 온 적이 없었다"는 가이드의 말에 미안함이 덜해지고, 그의 언어 센스에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오정훈 지점장이 계산해준 저녁 자리가 한결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