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백두산 천지를 보면서 한라산에도 꼭 한번 가보리라 마음 먹은 것을 이제야 실행하는가 보다.
이번 등산에는 황정열 부부와 강영식 부부가 함께한다. 그렇지 않아도 발 상태가 안좋아 며칠전부터 등산을 포기한다고 했던 아내도, 이런저런 말로 구슬르고 또 다른 부인들의 강요(?)와 유혹에 이끌려 같이 하기로 한다. 몇년전 겨울에 영실에서 키를 덮는 눈밭에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눈터널을 지나 윗새오름에 오른 것이 한라산 등산의 전부였는데,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정상 등반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판악 휴계소에서 시작되는 등산길은 그저 평이하다. 자갈길을 따라, 돌길을 지나, 때로는 데크를, 흙길을 번갈아 걷는다. 굴거리 나무 군락을 끼고, 조리대 숲을 지나 그저 걷는다. 평이한 길이지만 그래도 오르기는 오르는가 보다. 4Km를 지나 속밭 휴계소에 이르러 겉옷을 벗고 땀을 훔친다. 바람을 맞으며 한입 베어 무는 과일이 꿀맛이다. 잠시후 뒷따르는 등산객을 위해 자리를 비우고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는 약간의 경사를 느낀다. 1000m 고도를 지나면서 주변의 모습이 달라진다. 활엽수는 거의 없고 그 많던 조리대마저 점점 자취를 감춘다. 나무의 잎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 1,300m 고도에 이르니 어쩌다 보이는 한두 그루의 구상나무만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을 뿐, 산 전체가 고사목 일색이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그런데도 젊은사람 몇몇이 뛰다시피 올라가는 것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더 멀리 가기위해, 더 오래 가기 위해서라도 천천히 가야한다고 자위해본다. 그렇다. 지금까지 그렇게 앞만보고 달려 왔는데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옆도 보면서, 가끔은 뒤도 돌아 보면서 가자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그렇게 오르길 3시간, 진달래밭 휴게소이다.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들이 모두 섞여 복잡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아내와 다른 일행들이 숨이 목에 차서 올라오고 있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게 안스럽다. 이제는 더 이상 못올라가겠단다.
일행중 아내를 포함해 둘을 남겨놓고 다시 오른다. 이제부턴 경사가 눈에 띄게 가파르다. 앙상한 나무 사이로 순간 순간 교차되어 투과되는 햇살이 발걸음을 더욱 어지럽힌다. 햇살의 움직이는 명암이 마치 싸이키 조명을 방불한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사위가 탁 트인다. 앙상했던 나뭇가지마저 보이는게 없고, 오로지 보이는 건 오르는 돌계단과, 여기저기 널려있는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바위 뿐. 1,900m 표지석이 눈에 보이니 정상이 눈 앞인데 발걸음은 천근이다.
이윽고 정상이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해서 보니 중국인 단체 관광개이다. 정상은 좁은데 좀처럼 내려가는 사람이 안보인다. 어련하겠는가? 모두 그렇게 어렵사리 올라왔을텐데....
정상에서 본 백록담은 실망스럽다. 특성상 백록담이 샘이 솟는 천지와 달라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물이 마른걸 보니 실망스럽다. 지난 여름 백두산 천지와 크게 대비된다. 그래도 오늘 날이 좋아 정상에서 모든걸 볼수 있다는데 위안을 삼는다. 뒤를 돌아 남쪽을 보니 서귀포 일대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다. 낯익은 범섬, 문섬, 섶섬 등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데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으로 그 모습을 담기 어려운게 아쉽다. 발아래 펼쳐지는 구름의 띠도 가관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운해와는 또 다르다. 띠의 형태로 떠있어 그 위에 내가 있고, 그 밑엔 서귀포 일대다. 그 모습을 그대로 두고 내려오기가 못내 아쉽다.
정상에서 본 구름띠
내려오는 길에 굽어보는 한라산과 그 주위 모습은 또 하나의 그림이다. 오를 때는 그저 돌길만 보고, 앞사람만 보고 오르기 바빴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다니... 고은 시인의 시 한줄이 생각난다. 올라갈 때 못본 꽃, 내려가면서 보았다고. 그렇다. 나는 지금 올라갈 때 못본 경치를 내려가면서 여유를 갖고 보고 있다. 지금의 내 삶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것도 일순. 진달래밭 휴게소를 지나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기만 하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을 관음사 코스로 했어야 했는데... 자동차를 성판악에 두고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데 더욱 지친 듯 성판악에 다다르니 몸은 이미 녹초다.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 해 냈다는 뿌듯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