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주일 전부터 계속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에도 불구하고, 그저께도 맑았고 어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날이 좋았다. 오늘도 역시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 꼭두 새벽부터 날씨를 주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보상의 우천 시기가 계속 늦어지고 있어, 엇그제와 마찬가지로 예보가 빗나가길 기대하고 숙소를 나선다. 오늘의 주목적지는 모레인 호수(Moraine Lake)와 설파산(Sulphur Mt. 2451m)의 밴프 곤돌라(Banff Gondola).
어제 루이스 호수에서의 주차 문제로 인한 학습 효과로 아침도 거른채 일찍 출발한다. 그런데도 이 호수 역시 워낙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바 있어서 그런지 같이 달리는 차들이 모두 우리와 목적지가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많은 차들이 모레인 호수 방향으로 들어간다. 긴장의 끈을 놓지않고 달린 결과, 목적지 도착 시간은 7시 25분. 다행히 주차 공간은 여유가 있는 상태다. 마치 무언가 큰거 한 건 이룬 느낌이다.
그러나 너무 서둘렀나? 기대했던 대로 예보는 빗나가 날씨는 좋은데, 아이들이 너무 추워서 차에서 못나오겠단다. 옷을 단단히 준비했는데도 역시 록키의 아침은 한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과 여자들을 남겨두고 종욱이와 둘이서 트레일에 나선다.
트레일 전에 호수 입구에 쌓인 바위산(Rock Pile)에 올라 이른 아침의 호수 전경을 본다. 강렬하지만 아직은 제대로 힘을 발하지 못하는 햇살 탓인지, 마치 바위들 품에 안기어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난 호수처럼 살짝 일렁인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햇빛에 반사된 에머랄드 빛 호수가 어른어른 거린다. 호수 왼편에 줄지어선 10개의 잿빛 바위가 물속에서 치렁치렁한다.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시리다. 그 모습을 그대로 두고 인근의 콘솔레이션 호수(Consolation Lake)를 찾아 트레일에 나선다. 두 시간쯤 뒤면 햇빛도 달라지면서 호수 빛도 달라지겠지.
이른 아침 숲속의 트레일은 적막감이 돈다. 빼곡히 들어찬 침엽수림 때문에 햇빛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일까? 쭉쭉 뻗은 나무중에 밑둥이나 곁가지가 하얗게 죽어가는 나무가 여럿 보인다. 알고 보니 죽은게 아니라 나무의 끝은 왕성하게 살아있다. 이 나무들도 살기 위해 햇빛과 바람을 제대로 쐬지 못하는 부분을 스스로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꼭대기 부분의 광합성 작용 만으로는 그들까지 살리기가 어려웠겠지. 이것을 적자생존이라 해야할까, 아니면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고 해야할까?
숲속의 젖은 길이 갑자기 탁 트인 물가로 이어지더니 난데 없는 바위길이 된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길 전체를 가로 막는다. 보아하니 우측 바위 산에서 빙하가 녹아 내리며 동시에 바위와 지면을 깎아 굴러 떨어진 것들, 이른바 빙퇴석인가 보다. 지나해 가을, 제주도의 올레길 8코스를 걸으면서 갯깍 주상절리의 떨어져 나온 바위들이 바닷가에 쌓여 이루어진 소위 해병대길과 아주 흡사하다. 다른점이라면 크고 작은 바위가 뒤섞여 있고, 굴러 떨어진 바위들이 모난 상태로 그대로 있다는 것이 차이다.
바위 구간을 지나 도착한 콘솔레이션 호수는 분명 빙하 호수인데도 색깔이 다르다. 멀리서 유심히 보니 아주 흐릿한 초록빛이 띄는듯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보통의 물색이다. 물이 깊지 않고 또 이른 아침의 햇살이 강하지 않아서일까? 혹 시간이 흐르면서 물 색깔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물 색깔의 변화를 추적하려는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를 세워놓고 대기중인 모습이 눈에 띈다.
물은 깊지 않고 넓지도 않지만 주변의 바위산과 빙하의 조화는 그대로 절경이다. 특히 물속에 비쳐진 풍경의 명확한 데칼코마니는 자연의 훌륭한 작품이다.
트레일을 서둘러 마치고 아이들과 조우하여 다시 찾은 바위산(Rock Pile). 그사이 이미 인파는 넘쳐난다.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들과 여기 저기서 사진 찍기에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아이들 추억거리 만들어 주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두어 시간 전의 호수 빛깔과 지금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처음 볼 때의 어른거림이 사라진 듯하고 호수 색깔 또한 더욱 짙어진 느낌이다. 날씨에 따라, 햇빛의 강도에 따라 빛 반사율이 달라져 순간적으로도 호수 색깔이 달라진다더니 모레인 호수에서 그걸 느낀다.
호수를 둘러싼 병풍같은 바위며, 그 위에 얹혀진 만년설과 가지런히 정리된 침엽수 군락. 앉아있기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어제 본 루이스 호수가 한눈에 보기에는 더 커 보여도, 어딘지 정제된 느낌이고 여성스러운가 하면, 모레인 호수는 규모는 작지만 자연적이면서도 어딘지 거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밴프 전체가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이유가 바로 이 호수 때문이라는데 그럴만하다고 생각된다. 캐나다 지폐 C$20짜리에도 이 호수가 그려져 있다니 이나라 사람들이 이 호수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자긍심을 갖는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호수보다 루이스 호수를 더 많이 찾는다는데 불가사의한 일이다.
모레인 호수를 뒤로하고 이제 밴프 곤돌라(Banff Gondola)를 향하여 밴프 시내로 달린다. 밴프 곤돌라는 설파산 정상에 만든 전망대로 밴프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밴프 시내는 사방팔방이 모두 산에 갖힌 분지 형태다. 그 분지는 멀리 자스퍼 쪽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바우강과 스프레이강(Spray River)이 만나는 지점에 타운을 형성하여 발달한 것 같다. 타운을 감싸고 있는 사방의 산과 강과 호수와 크릭들은 밴프의 젖줄인 듯 하다. 지금은 여름이라 그렇지만 겨울 스키 시즌이면 스키어들의 천국이 될 거라는 상상이 저절로 든다. 실제로 안내 지도상에 밴프 주변의 Ski Area가 꽤나 많이 보이는데, 록키의 절경에 이런 자연 환경을 가진 이나라 백성들은 복 받은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망대에서 바로 북쪽 하늘 아래 모레 찾아갈 미네왕카 호수(Minnewanka Lake)가 빼꼼히 보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곤돌라는 어느덧 산 아래에 내려왔다. 이제 바로 옆의 밴프 온천(Banff Upper Hotsprings)에 몸을 담그러간다. 그러나 이곳의 온천 문화가 우리와는 너무도 달라서 온천이라기보다는 따뜻한 수영장이라 하는게 맞을 듯하다. 오래 머물기가 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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