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와 호도협
지난해 여름, 백두상 트레킹을 함께한 친구들 중 일부가 제안하여 이루어진 차마고도 트레킹 일정이 설레임과 더불어 다가왔다. 백두산에서 같이한 진욱, 태우, 정룡, 홍대와 나,그리고 이번에 조인한 구태환이 함께한다. 사람이 살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렇게 두번씩이나, 그것도 거의 일주일 가량을 같이 먹고, 자고, 걷는 일을 함께하니 우리들의 인연의 끈은 두텁기도 한 모양이다.
어둠을 가르며 떠나는 사천항공 비행기의 여객은 우리와 같은 여행객이거나, 일명 따이공이라고 부르는 보따리상 둘중 하나인 것 같다. 각종의 물건을 가득히 꾸린 비닐 포장이나 커다란 가방 등이 배낭과 뒤섞여 비행기 내부 소화물칸은 만원이다. 모자라는 소화물칸에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승무원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말로만 듣던 보따리상들의 처절한 삶의 현장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
저녁 9시 즈음 인천공항을 출발, 청두(成都)를 거쳐 다시 국내선으로 리장(麗江)에 도착하여 트레킹 시작점인 교두진에 이르기까지는 호텔에서 두어시간 머문 시간을 포함하여 꼬박 13시간이 소요됐다. 인천에서의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그야말로 지난한 시간을 비행기와 버스속에서 졸음과 부대끼며 이동한 긴 하루였다. 게다가 나는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배탈과 설사로 인해 이동중 심한 고통을 받은 후로, 무엇이든지 먹기가 꺼려진다. 덕분에 말로만 듣던 간이 휴게소 내의 밖이 다 보이는 화장실 신세를 져볼 기회(?)도 가졌다. 출발 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가지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하지만 교두진에 도착하여 어떻게든 기운을 차려야겠기에, 조심스럽게 점심을 마치고 오늘과 내일 양일간 산속에서 지낼 별도의 배낭을 꾸린다. 그리고 6명씩 팀을 이루어 미니밴에 올라 20여분 지나 나시객잔에 이른다. 여기가 트레킹 시작점이다.
트레킹은 고도 2,100m에서 시작된다. 시작점에는 나시객잔을 가리키는 표지석 이외에 또 하나의 표지석이 있다. [車馬古道二十四道拐段]. 뜻을 물어보니 24번 휘어있는 도로란 뜻으로, 차마고도가 24개 지역을 거쳐가는 거대한 도로란 뜻이란다. 2013. 5. 3일에 중국 국무원에서 전국 중점 문물로 공포하고, 2016. 4. 10일에 운남성 정부에서 세운 표지석이다. 이것을 보니 지금 가려는 이 길이 중국인들이 옛부터 애착을 갖고 걸은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크로드 이전부터 중국 서남부에서 티벳을 지나 네팔, 인도까지 약 5000Km에 이르는 육상 무역로로, 차와 약초, 소금, 말 등을 교환하기 위해 때론 몇달씩 목숨을 걸고 다녔을 길이었으니 왜 안 그렇겠나?
옛사람들이 삶을 위해 다녔을 길은 험준하고 힘든 길이었겠지만, 오늘의 이 길은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 예보로인해 우산과 우의 등을 챙겨왔지만 이렇게 날이 좋을 줄이야. 이게 바로 고산지대의 날씨란다. 이러다가 언제 또 비를 만날지도 모른단다.
발 아래 멀리 금사강의 물과 모래가 넓고 좁고를 반복하며 반짝인다. 이 강이 중국의 중원을 흐르는 양자강의 상류란다. 옛날에는 이곳 모래에서 사금을 채취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저 아래 모래가 더욱 반짝이는 듯하다. 멀리 보이는 옥룡설산(玉龍雪山, 위룽쉐산) 꼭대기에 신선이 바라보듯 잠시 햇빛이 살짝 들어왔다 이내 사라진다. 오밀조밀하고 뾰족한 정상에 내려앉은 햇빛이 주변의 구름을 꿰뚫고 쏟아진다.
지금 나는 합파설산(哈巴雪山, 하바쉐산)의 중턱을 가로지르며, 맞은편 옥룡설산의 육중함과 양쪽 산 사이의 협곡을 보면서 걷는다. 협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여기까지 웅장하게 들린다. 맞은편 산에도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비교적 평탄하게 보이는 잔도가 있다. 이 지역 나시족이 약초를 캐어 운반하는 길이란다. 눈으로 잔도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면서 길이 험해진다. 경사때문에 그런지 길이 굽어지면서 오른다. 28번 굽어진다고 해서 28밴드라는데 실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굽은 듯하다. 오르는 길에 숨이 차다. 험한 길을 말을 타고 가라는 현지인의 유혹이 거세다. 이미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말무리가 꽤 많다. 그러나 이 험한 길에 말을 타면 그게 더 무섭고 힘들 것 같다. 길이 돌아가면서 저 아래 협곡의 물소리가 들리다 말다를 반복한다. 산세의 움직임인가, 내가 움직인 때문인가? 가쁜 숨을 진정하려 어깨를 펴니 맞은편 설산의 잔설이 햇빛에 투영되어 맑게 빛난다.
28밴드를 지나니 길이 고요해진다. 내리막과 평탄함의 연속이다. 그래도 오르막을 지나며 벌어진 일행의 앞과 뒤는 서로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지나 도착한 차마객잔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먼저 온 친구들은 벌써 맥주를 즐기는데 뒤따르는 친구 몇몇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차마객잔의 식당벽은 온통 한국인의 흔적이다. 유명인의 사진도 많이 보인다. 사진과 낙서와 그림들이 혼합된 경연장이다.
객잔의 전망대에 올라본다. 맞은편 설산으로 넘어가려는 햇살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빛이 요란하다. 우리 일행의 사진찍기를 부탁 받은 이곳 나시족 한 분이 몸을 낮춰가며 어려운 포즈로 사진을 담으려 애쓴다.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그 사진은 우리들중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막큼의 작품으로 남았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먹는다는 오골계 백숙으로 풍성한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린다. 그 좋던 날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줄이야. 덕분에 기대했던 밤 하늘의 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맥주에 온 몸을 적셔본다. 별이 빛날 내일을 기대하면서....
이른 새벽에 커튼을 걷으니 눈앞에 설산이 버티고 있다. 가히 장관이다. 하늘에 비는 걷혔지만 방금 전까지 비가 내렸음을 땅이 말해준다. 웨만하면 별을 볼 수도 있으련만 멀리 닭 우는 소리만 요란하다.
식당에 들르니 오골계 닭죽과 빠바라는 이 지역 빵이 아침이란다. 옛 마방들이 며칠씩 걸으며 먹던 음식이라는데 간수하기도 편하고 먹기에도 좋다. 특별한 향과 맛이 없는 무미의 맛이라 할까? 그러나 여기에 꿀을 바르니 그 맛이 일품이다. 옛사람들은 꿀 없이 먹었겠지만.
차마객잔에서 중도객잔과 관음폭포를 지나 중식 장소인 장선생객잔까지는 약 9Km.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흙길이다. 살짜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이 상쾌하다.수십 마리의 염소를 개 한마리의 힘을 빌려 몰고 다니는 목동의 모습이 분주하면서도 평화롭다. 한두 마리의 돼지를 키우기 위한 돼지우리에서 60년대의 내 모습을 본다. 설산에서 녹아내리는 한줌의 물이라도 모으기 위한 파이프가 산과 들과 길에 널려있다. 물이 부족한 고산 지대라서 만년설의 녹은 물로 생활해야하는 이곳 나시족의 어려운 생활의 단면이다.
중도객잔에서 보는 합파설산은 돌산이다. 그래도 정상은 소나무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우리는 보통 家和萬事成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집안의 글귀는 家和萬事興이다.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뉘앙스다. 중식 장소이자 호도협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장선생객잔이 차마고도 트레킹의 마지막인가 보다. 나시객잔에서 이곳까지 16.5Km. 운남성에서 티벳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약 4개월에 걸쳐 걷는다는데 그중 극히 일부를 걸은 셈이다.
장선생객잔에서 중호도협까지의 왕복 길은 약 2Km. 그러나 내려갈 때의 고꾸라짐과 오를 때의 가파른 경사는 가는이의 숨을 멎게한다. 원래 하나의 산이었던 이곳이 지각운동으로 인해 옥룡설산과 합파설산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 협곡을 만들었으니 이 협곡을 흐르는 강이 금사강이란다. 장강의 원류로 그 길이가 16Km에 달하는데 그중 일부에서는 호랑이가 뛰어 넘을 만큼 좁다고 호도협이라다. 강 상류부터 상, 중, 하 세개의 호도협이 있는데 우리는 그중 중호도협엘 가는 중이다.
강에 가까워지면서 요란한 물소리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넓은 강 줄기가 호도협에 이르러 병목현상을 일으키니 그 소용돌이가 오죽하겠나? 호도협에 도착하니 맑던 하늘에서 또 비가 뿌린다. 웅장한 물소리에 소용돌이의 물보라와 빗물이 바람에 뒤섞여 혼란스럽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더불어 분주하다. 그런 중에도 강 중간에 넓게 자리한 바위 위에서 이곳 저곳의 비경을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 모습을 보겠는가? 들이치는 비바람과 거센 소용돌이의 요란한 폭음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행이 있는 여행이기에 모이는 시간이 있어 이 장관을 눈 앞에 두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길을 오른다.